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경영 마인드업] 주체적인 삶을 위해 ! '지식의 권유 - 김진혁'
    1.경제경영의 나비효과/① 경제경영 공부 2015. 8. 4. 00:00
    반응형
    [타인이 원하는 삶을 깨부셔야 할 때] 지식의 권유 - 김진혁

     

    "사유하는 힘을 기르지 못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타인이 원하는 삶, 알맹이가 없는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


     참 무서운 말입니다. 
     기계처럼 
     남이 원하는 삶이라니요..

     과연 우리는 원하는 삶을 살고 있을까요?







     박제된 학문과 편협한 지식 


    흔들리고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위로받고 싶나요?
    꿈을 향해 전진하라며 등떠밈을 받고 싶나요?

    그러면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전진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무엇을 위해? 왜?

    이것을 모르는 상태라면 이미 우리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박제된 학문과 편협한 지식이 우리를
    멋진 양복에 값비싼 구두를 신고 있는
    '스미스 요원'으로 만들고  말것입니다.








    생각의 근육이 필요하다


    지금 청춘에게 필요한 것은 소위 식스팩이라 불리는 복근이 아닙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길든
    지독한 ‘지식의 편식’ 탓에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생각의 근육’을 단련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지식의 식단’이 필요할 뿐입니다.









    더 늦기전에 생각해야 할 것들

     
    이 책에는 생각해볼 것들이 꽤나 있습니다.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

    지식에 대하여

    ...특히 ‘돈’에 경도되어 있는 지식 혹은 사회는 필연적으로 ‘공허함’을 유발한다.
     
    물질이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전도되면서 목적 역할을 해 줄 무언가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남들이 말하는 성공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질 게 없는 현실을 마주하는 순간에도 공허함이라는 마음의 병이 찾아온다.
    그리고 이러한 공허함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게 된다.

    ...어느새 세상의 속도에 떠밀려 또다시 부와 성공의 공식에 맞춰 흘러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악순환처럼 반복되는 공허함과 위안의 쳇바퀴 속에서 사는 셈인데,
    결국 ‘위안의 지식’은 공허함에 대한 보완일 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근본적인 해답이 되기는 어렵다.

    위안의 지식도 결국엔 지식을 물질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는 또다시
    물질을 쫓고 공허함을 느끼고 위안을 ‘재공급’ 받는 안타까운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고정관념을 끊임없이 확인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노력 속에서 모든 지식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받아들인 지식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는 게 바로 열린 지식의 기본이다.

    ...대상과 나, 그 사이에 존재하며 둘을 연결시켜주는 이성과 감정에 대한 왜곡 없는 ‘앎’, 이것이 바로 ‘통찰력’이다.

    =====================================================

    분노에 대하여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처럼 자연스러운 분노를
    무조건 잘 참아내야만 하는 ‘나쁜 감정’ 혹은 ‘위험한 감정’ 이라고 배워왔다.
    느끼는 것은 물론 함부로 표현해서도 안 되는 감정 말이다.

    도대체 왜 유독 분노에 대해 억제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은 걸까?
    어째서 우리는 이런 태도를 별 문제없이 받아들이게 된 걸까?...

     

    ...분노가 제한된 대표적인 노예가 있다. 바로 노예다.
    물론 자유롭지는 않지만 노예에게도 기쁨과 즐거움, 슬픔은 허락된다.
    하지만 분노는 절대 허락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만약 노예가 분노를 한다면 그 원인이 무엇이겠는가?
    노예라는 이유로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때가 아니겠는가?

    이처럼 분노는 ‘노예’라는 것에 대해 이성적으로 문제의식을 갖게 만들어 준다.
    노예가 분노를 느낀는 순간
    주인의 입장에선 더 이상 노예로 부릴 수 없는 매우 위험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반면 분노가 허용된 주인은
    노예가 건방지게 굴거나 시킨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 경우
    단순히 화만 내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부당하다’라고 규정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

    그냥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가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걸 
    ‘부당함’이라고 규정하여 애초에 노예가 ‘분노할 이유’를 차단하는 것이다.

    이처럼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단순한 계급 불평등만이 아니라
    분노 불평등’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명확한 계급적 불평등이 없는 사이라도 ‘분노 불평등’이 존재한다면
    이는 근본적으로 주인과 노예의 관계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고 봐야 한다.
    만약 분노 불평등이 만연한 사회라면? 이는 ‘노예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노예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저항을 하든 말든 최소한 똑똑해지기 위해서라도
    이성적 각성은 반드시 필요하며 이때 자연스럽게 동반하는 분노 역시 꼭 필요하다.

    그러니 누군가 자꾸 분노를 못하게 만들면
    ‘이 사람이 나를 멍청하게 만들려고 하는 구나’라고 생각하면 된다....

    ======================================================================================

    그밖에...
      

    ...노예는 뛰어나도 노예고 성공해도 노예다.
    아니 오히려 뛰어나고 성공했기 때문에 더욱 더 노예라는 사실에 충실한 삶을 살게 된다.

    명문대에 입학하고도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아이들,
    안정된 직장만을 쫓는 아이들은 괜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제3자’인 어른들이 삶의 주체성을 빼앗은 결과다.

    흔히 요즘 아이들이 ‘꿈’이 없다고 하는데
    이 역시 바로 ‘주체성’을 길러주지 못하는 교육과 무관하지 않다.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고 선택해보지 못한 아이가
    선택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꿈을 어떻게 가질 수 있겠는가?

    ‘꿈이 없는 아이들’은 교육이 부실해서 만들어진 ‘실수’가 아니라,
    소외와 대상화에 충실한 교육이 만들어낸 ‘정확한 결과물’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88만원밖에 받지 못하는 게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기성세대’에게 있다.

    따라서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88만원 세대’라는 표현보다는

    ‘젊은이들에게 88만원을 강요하는 (기성)세대’ 혹은
    ‘88만원을 강요받는 (젊은)세대’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



    생각하는 힘이 필요하다

     
    생각이 많아져 고민이 쌓인다면 
    그것은 쓸데없는 생각일 뿐입니다.
    그것은 생각에 끌려다니는 꼴이지요..

    우리는 주체적으로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차분한 마음 속에서 스스로에게 말을 거는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강조하자면
    노예로 살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생각해야 합니다.


    [지식의 권유 - 김진혁] 지식의 권유 - 김진혁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Tistory.